미주크리스천신문

미주크리스천신문 The Korean Christian Press 2002년 11월 16일 토요일

“전도하다 천국가고파 남은 생 드린다”

글 •박미미 취재부장

“RV로 미국 50개주 전도여행” 박승목,영자 집사부부 (상)

나는 미신도 믿고, 불교도 믿는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 해마다 굿을 하는 것을 보고 성장했다.

결혼해서는 시부모님이 섬기는 불상 앞에서 무릎이 닳도록 절하며 살았다.

결혼 후, 첫아들이 태어나고 시작된 집안의 우환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심신을 피곤하게 했다.

아이가 약해서 하루가 멀다하고 병원신세를 져야했고, 가정부아이는 정신착란증세로 병원에 입원했으며 다음에 온 가정부조차 비관자살을 하여 온 집안을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대학에 다니던 시누이, 친정사촌 여동생이 연달아 자살을 하여 감당키 어려운 충격으로 시달렸다.

남편의 사업도 세 번 실패로 빚더미에 앉게 되었고, 단칸방으로 이사해야 하기에 이르자 나는 동반자살까지 생각하면서 그동안 철저히 섬기던 부처의 존재에 대하여 회의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신에 대한 존재를 다시 캐물으며,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떤 신인가가 궁금했다. 그해 1월 첫째 주에 교회에 갈 마음을 갖고 준비를 하던 중 누군가가 뒷덜미를 잡아채며 “배신자 어딜 가느냐?”는 또렷한 소리를 들으며 섬짓하여 그만 주저앉았다.

그러나 일주일 후, 마음에 강력한 소원에 이끌리어 우리 가족은 교회에 발을 딛게 되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던 남편의 교만은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던 날 꺾였고, 남편은 교회 화장실이 너무나 더러운 것을 보고 다음날 새벽부터 누렇게 찌들어 악취나는 변기를 닦기 시작했다.

그 당시 실업자였던 남편은 교회 화장실 타일의 찌든 것을 며칠 동안 깨끗이 해 놓으며 성전을 청소하는 일로 기쁨을 갖게 되었다.

그 후 그 해 8월, 여의도 광장에서의 “나는 찾았네 새 생명”이란 큰 집회(C.C.C.)에서 김준곤목사님이 해외선교사를 위한 서원자를 찾으실 때 (1980.8.15) 11살이었던 큰 아이 지훈이는 목사가 될 것을 서원하였고, 남편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단기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하였으며 나는 중보자가 되겠다는 헌신의 약속을 했다.

이렇게 영적인 축복은 많이 받았지만 우리는 어려움을 벗어나지 못하는 삶을 살며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며 살았다.

매일 밤 9시에 교회로 나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기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1981년 12월 3일에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들어오라는 I-20 Form이 우편으로 도착되었다.

어느 집사님의 남편이 유학생이었는데 우리의 사정을 알고 보내주신 것이었다.

학교 등록일은 1982년 1월 10일이었는데 2주 동안 유학생으로서 영어실력을 갖추어 미국대사관 앞에서 인터뷰를 받는 것은 불가능으로 보였지만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1981년 12월 17일 인터뷰에서 우리가족이 비자를 받도록 허락해주셨다.

82년 1월 5일, 가방 8개를 챙겨들고 미국에 도착한 가족들은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미국은 우리 눈에 천국이었다.

캘리포니아의 겨울은 나무가 푸르렀고, 꽃도 만발해 있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마음껏 고기를 먹일 수 있었다.

우리는 밤에 깡통을 주었고 마켓 쓰레기통에 버려진 야채와 과일을 주워와 먹었다.

미국에 올 수 없는 자들에게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께서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살 수 있는 영주권도 마련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살았지만, 조금 가져온 돈도 영주권을 내 준다는 사람에게 다 빼앗기고 이런 저런 환경 때문에 제한을 받으며 낮에는 노동을, 밤에는 영어공부를 하였다.

말씀에 든든히 서 있지 못한 나는 억울하고 분한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 결국은 쓰러졌는데 대장경련으로 시작된 병은 합병증이 되어 온몸이 통증으로 시달렸다.

금침 1000개를 맞았지만 몸은 여전히 아팠다.

콩집어 먹듯 매일 약을 먹으며 고통속에서 신음하며 살던 나는 야고보서와 욥기를 읽으며 고통은 하나님의 연단임을 깨달았다.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하나님의 나를 향한 계획은 아프다가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고 확신하였고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히 12:10)라는 말씀으로 기쁨을 되찾게 되었다.

우리 가족은 1987년, 미국의 ‘얼헤드릭’목사님과 최재천목사님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영주권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내 병은 악화되어 묘지를 사야할 단계에 이르렀고, 환경의 변화가 도움이 될 지도 모른다며 이사를 권유하는 의사의 말에 샌디에고에서 살던 우리는 교회성도들의 도움으로 LA Northridge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RV로 미국 50개주 전도여행” 박승목,영자 집사부부 (하)

남편은 처음 이민 오던 때처럼 일당 30~40불을 받으며 노동일을 시작하면서 가난을 철저히 배우며, 밤이면 고통 스러워 하는 나를 위해 피곤을 무릅쓰고 주물러주곤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남편과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초등학생이었던 두 아이는 어느새 자라 대학생이 되었다.

아프다는 핑계로 새벽 기도도 못하던 나는 집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요한계시록 2:2-5의 말씀에 쇠망치로 뒤통수를 맞는 듯한 느낌에 쓰러져 회개하며 첫사랑을 잊어버린 자신의 모습이 회복되길 원하는 통곡의 기도를 드렸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는 말씀을 보며 나를 지성소로 삼으시고 내 안에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능력이 전능하심도 모르고 병에 눌려 있었으며 믿음 없었음을 회개하였다.

하루도 약 없이는 살 수 없었던 나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경험하게 되었고 나음을 얻었다.

그러나 내가 치료 받은지 20일만에 남편이 간암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

정밀검사를 하고 치료해야 된다는 의사의 말에 “아내의 병을 고쳐 주신 하나님은 나의 병도 고쳐주신 하나님은 나의 병도 고쳐 주실 것으로 믿는다”고 남편은 이를 사양했다.

찬송가 185장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찬양을 하던 남편은 자신에게 그렇게 물어 보시는 주님께 답변할 말이 없어 통곡하며 주님께 무릎 꿇었다.

생명이 남아 있을 때 물어보시는 하나님 앞에 감사로 답변할 수 있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 남편은 그 해 나성영락교회에서“예수초청잔치”때에 남은 생명 주 위해 사용 받다가 천국가기를 소원한다며 마음의 열정을 바치는 계기로 삼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남편의 건강이 회복되었고, 1993년 전도폭발 훈련에 임하면서 전도의 열정이 우리 부부의 가슴속에 넘치도록 부어졌다.

9년 동안 전도폭발 훈련자로 경험을 쌓으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셨다.

21년동안 기도해온 큰 아들의 서원의 성취가 지난 1월, 이루어져 EM사역이 시작되었으며, 부모가 병으로 고통하는 모습을 지켜본 작은 아들은 의사로서 꿈을 이루어 이제 뉴욕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으며 가난한 자 병든 자들에게 마음을 나누는 의사가 되겠다고 한다.

4년 전부터 우리 부부는 믿지 않는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에 그것을 위해 무릎꿇는 시간을 많이 갖도록 얽매인 삶을 놓고 기도하던 우리는 예수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빚어주신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날까지 사랑하는 예수님을 전하는 삶을 살자고 결단하였다.

우리는 핸디맨으로 고생해서 장만한 집과 사업을 모두 정리하고 사도바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으며 RV를 장만하여 거기서 먹고 자면서 미국 전지역으로 자비량 전도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생각만해도 넓은 땅 미국지도를 건네준 어느 분의 50개주 퍼즐을 하나 하나 놓고 기도하던 내게 미국은 기도로 흘린 눈물의 땅이다.

보잘 것 없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와 같은 우리 부부지만 주님의 손위에 놓아 축사하셨을 때에 놀라운 역사를 이루실 것이라 믿으며 곳곳 마다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담대히 떠난 길에 특별히 준비할 것은 없었다.

오히려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 하나 버리는 것이 준비라는 것을 깨달았고, 모든 것을 버렸을 때에 세상 모든 것을 마음껏 누리며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풍요로움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가 가는 곳에 한인교회가 있으면 간증하며 예수를 전하였고, 교회를 다녀도 믿음의 확신이 없는 이들의 연락처를 그 교회 목사님께 받게 되면 직접 그 분을 찾아가 예수를 영접시키고, 구원의 확신을 갖게 하는 사역과 교회 다니다 실족되어 교회안나오는 사람 다시 하나님께 회복 할수있도록 사역을 감당하고있다.

때론 사역비를 충당하고져 가정에 고장난 물건을 고쳐주기, 플러밍 등으로 일거리를 찾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주님이 부르실 때에 “조금 전까지도 주님을 간증하다 왔습니다.” 라는 대답을 하고픈 우리 부부는 만나는 자들이 복음을 받고 영접하게 될 때, 주님께서 사마리아여인이 복음을 받자 배고픔을 잊으신 것처럼 부요함을 누리는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동양선교교회(강준민 목사)에서 국제 전도폭발 임상훈련에 간증하기 위해 지난 10월 말경에 LA을 향해 달려왔다. 다시, 내년 5월에 워싱턴DC에서 열리는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국제 전도폭발임상훈련에 간증자로 초청 받았기 일정에 맞추어 11월 초, 전도여행길을 나섰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들을 꼭 만나게 하실 뿐 아니라 각 지역의 병원과 양로원에서도 예수를 전할 때에, 우리가 가는 땅을 축복하는 이 사역에 성령의 도우심과 은혜가 늘 함께 하실 것을 믿는다.

전도에 생을 바치고자 작은 보리떡 하나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우리 부부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높이 드러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