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문 (5월 1일 2002년)

간 증 문

“바라는 것들의 실상”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저는 미신도 믿고 불교도 믿는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 해마다 굿을 하는 것을 보고 성장했으며 결혼해서도 시부모님이 섬기는 불상 앞에서 무릎이 닳도록 절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첫 아들을 낳고부터 시작되는 집안의 우환은 걷잡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가 10살이 될 때까지의 일들은 생각도 하기 싫은 사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아이는 하루가 멀 다하고 업고 병원으로 뛰어야 하는 약한 아이였고 가정부 아이는 정친착란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시켜야 했고 그 다음에 둔 가정부는 비관 자살을 하여 온 집안을 피투성이로 만들었고 연달아 대학교에 다니던 시누이의 자살과 친정 사촌 여동생의 자살 등은 저에게 감당키 어려운 충격이었습니다.

또한 남편이 하던 사업은 세 번씩이나 실패하여 빚더미에 않고 단칸방으로 이사해야만 했습니다.

동반자살을 생각하면서 그 동안 철저히 헌신적으로 믿어왔던 부처라는 신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으며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믿어왔던 부처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

우리가 이 지경이 되도록 도와 줄 수 없는 신인가?” 라는 회의감이 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1979.12)

1980년 1월 첫째 주 하나님이란 도대체 어떤 신일까? 알기 위해 교회에 가려는 저에게 그 무엇인가 뒷덜미를 잡아채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배신자! 어딜 가느냐?” 하는 소리에 저는 섬짓하여 그만 두려움에 떨고 교회도 못 가고 일주일 동안 제 속에서 두 마음이 싸우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신에 대하여 알고 싶은 강력한 소원에 이끌리어 둘째 주일 난생 처음으로 우리 4식구는 교회에 갔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던 남편의 교만을 교회에 첫발을 들여놓던 날 하나님은 꺾으시려고 남편의 마음을 붙드셨습니다.

누렇게 찌들어 악취 나는 화장실을 그 다음날 새벽부터 닦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도 하기 싫어하는 그 일을 하도록 강력한 부담감을 주셔서 교만했던 남편의 머리를 숙이고 악취를 마시며 얼어붙은 타일의 찌들은 것을 몇 일 동안에 깨끗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 후부터 실업자였던 남편은 날마다 성전을 청소하는 일로 기쁨을 갖게 되었습니다.

1980년 8월에 여의도 광장에서 있었던 “나는 찾았네 새 생명”이란 큰 집회(C.C.C.)에서 해외 선교사를 위한 서원을 김준곤 목사님께서 인도하셨을 때 (1980.8.15) 11살이었던 큰 아이 지훈이는 이다음에 커서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 하였으며 남편은 하나님이 원하시면 선교사가 되겠다고 서원 하였으며 저는 아들의 강요로 중보기도 하는 엄마가 되라며 일으켜 세워서 온 가족이 서원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우상의 집안에서 불러내셔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시기까지 불같은 시험과 연단의 과정을 지내게 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정을 여러 모양으로 역사하셨던 일들을 어찌 다 지면에 쓸 수 있겠습니까.

살기가 어려워서 부모 형제에게 도움을 청해도 모두 외면하고 시부모님 돌아가신 후 상속문제로 큰 집과 다투면서도 매일 밤 9시에는 꼭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축복은 말할 수 없이 많이 주셨지만 어려운 생활은 돌보아 주시지 않는 것만 같았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의지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살기가 힘든 그 때 미국에 가면 막노동을 해도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을 누군가 해 주었을 때 우리도 미국에 가려고 알아보니 전혀 없고 있다면 위장결혼이란 것이 있었읍니다.

법률 사무소에 가서 호적을 갈라놓고 기도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불의한 방법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심을 깨닫게 해 주셔서 10개월 만에 호적을 다시 합해 놓고 날마다 하나님께 미국 갈 길을 열어 달라고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밤 성전에서 혼자 기도하고 성경을 읽다가 너무도 속이 상해서 성경을 덮었습니다. “너희는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말씀을 읽고서는 하나님께 따지며 울부짖었습니다.

잘 먹고 잘살면서 우리 상속분도 안주는 그런 큰 집을 축복하라는 말씀에 분통이 터졌습니다.

하나님과 줄다리기를 하듯이 이 말씀을 가지고 3개월을 버티며 저주는 하지 않겠지만 축복은 할 수 없다고 항의하며 순종치 않았습니다.

물질의 복만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았던 저에게 하나님은 찾아 오셨습니다.

회개의 눈물과 함께 용서의 마음이 용솟음치며 큰집 식구의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축복하는 저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15일이 지난 후 그 날 밤도 습관대로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사필귀정”이란 음성이 크게 작게 들려왔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또 15일 후 (1981.12.3)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들어오라는 I-20 Form이 왔습니다.

어느 집사님의 남편이 유학생이었는데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보내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학교 등록일은 1982년 1월 10일이었습니다.

어떻게 2주 동안에 유학생으로서의 영어실력을 갖추어 미국 대사관 앞에서 인터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심을 믿었습니다.

1981년 12월 17일 인터뷰 받던 그 날은 아침부터 하나님께서는 여러 모양으로 약속의 말씀을 이루셨고 역사 하셨습니다.

특히 인터뷰 받는 그 방에 성령의 임재로 남편의 귀를 열어주셨고 혀를 움직여 주셔서 영어를 다 알아 듣고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으므로 그날 오후 3시에 비자를 받는 엄청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려고 홍해를 건넜듯이 우리 4식구는 참으로 형용키 어려운 감동으로 가방 8개만을 들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1982.1.15)

LA공항에서 하늘을 우러러 감사드리며 공항 땅에 엎드려 통곡했습니다.

꿈만 같고 현실로 생각되지 않았지만 우리 눈에 보인 미국은 마치 천국이었습니다.

겨울인데도 나무는 푸르고 꽃도 만발하고…. 참으로 하나님께 감사한 것은 아이들에게 마음껏 고기를 먹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밤이면 깡통 줍고 마켓 쓰레기통에 버려진 야채와 과일을 주어다 먹어도 기쁘고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합3:17-18)

길거리 나무 밑에 떨어진 오렌지가 아까워 주워 먹으며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올 수 없는 길을 열어 주셨으면 미국 땅에서 살아 갈 영주권도 마련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 (히11:1)으로 기쁘게 살아갔지만 세상은 우리의 기쁨을 기쁘도록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조금가지고 온 돈도 영주권을 내 준다는 사람에게 다 빼앗기고 남편은 낮에는 노동을 밤에는 알아듣지 못하는 학교 공부를 해야 했습니다.

영주권 없는 환경 때문에 여러 가지로 제한을 받아야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8개월 후 노동을 하지 않는 관리직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이든지 시기와 질투는 있어서 영주권 없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협박하며 괴롭혔습니다.

육신적인 생활에 자꾸만 상처를 입다보니 말씀에 든든히 서 있지 못한 저는 말씀으로 세상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은혜 충만, 성령 충만의 역사만을 알았던 저에게 사람들을 통해 넘어뜨리려는 악의 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오래참고 ….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13:4-7) 하신 말씀만 생각나므로 그냥 억울해도 참고 분해도 참고 괴로워도 참다보니 미련한 저는 스트레스가 쌓여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던 것입니다.

이후부터 저는 사람들을 원망하고 판단하고 속으로는 미움이 자랐지만 겉으로는 웃어야하는 가면을 쓴 생활을 하였습니다.

병은 점점 더 깊어져 폐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985.5)

유명하다는 병원도 찾아 다녀보고 신유집회로 기도원으로 들어가 금식도 여러 날 해 보았습니다.

대장 경련으로 시작된 병이 합병증이 되어 온몸이 통증으로 시달렸습니다.

금침 맞으면 낫는다 하여 침을 맞은 것이 제 몸 안에는 1,000개의 금침이 지금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아팠고 매일 같이 콩 집어먹듯이 약을 먹으며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았습니다.

육신은 아팠지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행 하셨던 그 일을 생각하면서 이 고통은 하나님의 연단이라 생각하며 야고보서와 욥기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한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고통스러워 잠이 안 올 때에는 하나님께서 이 밤에 모두들 자니까 나하고 대화하시고 싶으시구나 하며 위로 받으며 말씀에 서지 못한 저에게 말씀 보는 시간 주신 것이라 생각되어져 말씀 붙들고 또 울었습니다. “나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함에 참여케 하시기 위하여 징계하시고 연단하신다.” (히12:5-13)고 생각하니 오히려 기뻤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게 아프다가 그냥 죽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았습니다.

1987년 여름에 정말로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 미국 목사님 “얼 헤드릭”과 최재천 목사님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우리의 영주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11:1)이 되어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의 병은 악화되어서 묘지를 사야할 단계에 이르렀고 그런 과정에 의사는 환경의 변화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이사를 한 번 해보라고 권유를 하였습니다.

갈 곳도 없고 이사비용도 없었지만 교회와 성도들의 도움으로 샌디에고 에서 지금 살고 있는 벨리로 이사 오게 되었습니다. (1989.1)

이민 처음 온 것 같이 다시 남편은 일당 3~40불을 받으며 노동일을 시작하면서 가난을 철저히 배우면서 밤이면 아파하는 저를 피곤을 무릎 쓰고 주물러 주어야하는 고된 생활을 하면서도 귀찮거나 싫은 내색 한 번도 하지 않고 오직 사랑으로 위로하며 낫게 하여 주려고만 7년을 고생했지만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두 아이는 어느새 자라 대학생이 되었고 그동안 엄마가 해야 할 일들을 서루하면서 주안에서 아름답게 자라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기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프기만 했던 엄마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들의 힘겨웠을 사춘기마저도 잊은 채 엄마를 기쁘게 하여 주려는 모습이 더욱 눈물겹도록 고마웠습니다.

자식을 위한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는 망하는 자식이 없다는 성 어거스틴의 말을 생각하면서 이 험한 세상에서 지켜 주시고 성실하고 아름다운 믿음의 아들들이 되게 하여 달라고 기도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아들들을 키울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키워주세요. 믿음있는 아들들로 키워주셔요. 훗날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는 아들들로 키워 주세요.’

아프다는 핑계로 새벽기도도 못하던 제가 집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요한계시록2:2-5의 말씀이 저의 뒷통수를 쇠망치로 내려치는듯한 느낌으로 쓰러져 통곡하며 울부짖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처음 사랑을 잊어 버렸어요. 회개합니다. 어떻게해야 회복할수 있나요? 촛대를 옮기지 말아 주세요.”라고 뒹굴며 울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히4:12)의 말씀을 따라 저의 영혼에 힘을 얻고 충만하여 육체를 지배하여 주실 것을 간구 했습니다.

죄 가운데 있었던 저를 보았습니다.

어떤 도덕적인 죄보다는 하나님께 지은 죄를 통곡하면서 회개하였습니다.

성령을 소멸하는 죄, 기도를 쉬는 죄, 믿음으로 좇아하지 아니하는 것이 죄(롬14:23)라고 하셨는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이 없는 그런 자였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고전3:16) 저를 지성소 삼으시고 제 안에 들어와 계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능력이 전능하심도 모르고 병에 눌려 있었음을 깨닫고 믿음 없음을 회개하였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9-10)이 말씀의 능력 앞에 병은 굴복하고 떠나 버렸습니다.

하루도 약 없이는 병원에 가지 않고는 살수가 없었던 저는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경험하고 치유 받았습니다. (1991.5월)

그러나 놀랍게도 저를 위해 고생하고 지칠대로 지친 남편은 1991년 6월에 간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정밀검사를 하고 치료해야 된다고 서두르는 의사에게 “아내의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은 나의 병도 고쳐주실 것을 믿는다.”고 검사도 치료도 받지 않았습니다.

간암선고를 받은 남편은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은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수요예배 때 찬송가 185장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무엇 주느냐? 내 몸을 희생 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이것이 귀중 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을 부르며 통곡하던 남편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심이 영혼구원 전도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지친 육신으로 매일 저녁에 마켓 앞에서 노방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영주권 없는 서러움 속 에서 지낸 사람들과의 관계 형성 지독한 가난으로 없는 자의 아픔을 알게 하셨고 연속되어지는 병의 고통 속에서 육신의 아픔을 경험하게 하셨던 하나님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11:1)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온 저에게 하나님은 또 다시 역사해 주시어 남편은 전도 하면서 영혼에 기쁨이 넘치며 건강도 조금씩 회복되어서 1993년도에 전도폭발 훈련에 임하면서 전도의 열정을 우리 부부 가슴속에 넣어 주셔서 9년 동안 전도 폭발 훈련자로 나성 영락 교회에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순간순간 불꽃과 같은 눈으로 지켜봐 주시며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연단을 통해 하나님의 방법대로 우리 가정을 간섭하심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라 믿어졌습니다.

20년 동안 끊임없는 기도 속에 큰아들의 서원이 이루어지길 소원했는데 올 1월에 하나님께서는 큰아들을 EM 전도사로 부르셨습니다. 할렐루야 !!

부모가 병으로 고통 받는 모습을 지켜본 작은 아들은 의사로서의 꿈을 이루어 이제 뉴욕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하고 있으며 앞으로 가난한 자 병든 자들에게 마음을 나누는 의사가 되겠답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편119:71)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4년 전 1998년 우리 부부에게 하나님께서는 북미 50개주를 향해 나가 영혼 구원 하라는 비전을 주셨고 그것을 위해 무릎 꿇는 시간이 많게 하셨습니다.

믿지 않는 많은 영혼을 주께로 인도하고 싶은 간절함 때문에 시간에 얽매인 삶을 놓고 남편은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이제 우리를 이곳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우리 부부는 오직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것만이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되어져서 결단하고 모든 것 정리하고 사도바울의 고백을 우리 부부의 고백으로 삼으면서 미국 전 지역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려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 이로라”(고전9:16) 지면으로 다 쓸 수 없는 하나님의 간섭하심 속에서 오늘에 이르게 하신 그 하나님은 앞으로도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시며 어떠한 고난 속에서도 능히 이길 힘을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생활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신 하나님, 반석에서 생수를 주셨던 그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불신자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며 교회 안에 있는 거듭나지 못한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여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되는 축복의 기회를 주기 원하며 실족한 영혼들을 찾아다니며 신앙회복을 할수 있도록 사역하면서 예수 이름을 전하려 합니다.

또한 저희들의 전도여행 사역을 통해 평신도들의 마음속에 노후의 삶에 대한 도전을 주며 동역자 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일이라 믿어지기에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예수 이름을 높이며 찬양합니다.

“만 가지 은혜를 받았으니 내 평생 슬프나 즐거우나 이 몸을 온전히 주님께 바쳐서 주님 만 위하여 늘 살겠네” (찬송가 356장)

나성영락 교회 박승목, 박영자 집사 5월 1일 200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