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찬 타임스 연재. 제7회. RV에 복음을 싣고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 “광야 생활이 시작되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고 홍해를 건넜듯이 우리 네 식구는 우상이 들끓는 집안을 떠나서 참으로 형용키 어려운 감동으로 가방 몇 개 달랑 들고 돈도 없이 태평양을 건너 미국 Los Angeles에 도착 했을 때는 1982년1월5일 이였습니다.

공항에 도착하여 하나님께 눈물로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올 수 없는 미국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방법으로 급하게 출애굽 시켜주시듯이 미국 땅을 밟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살아갈 때에 믿음으로 살겠다고 하나님께 고백하며 우리가족을 도와주시고 인도하여 달라는 기도를 눈물로 간절하게 드렸습니다.

꿈만 같고 현실로 생각되지 않았으나 우리 눈에 보인 미국은 마치 천국같이 보였습니다.

1월 달 겨울인데도 나무에는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렸고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하여 피었고 가나안땅 같이 생각이 되었습니다.

아는 사람 없고 돈도 없고 영어도 모르고 영주권도 없는 열악한 환경 이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가족을 미국에 오게 하셨으니 함께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니 기쁘고 감사한 마음뿐 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생활은 광야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하여 밤이 되면 미국 마켙 뒤에 있는 쓰레기통에 가서 버려진 야채 과일 변한 고기 덩어리까지 주워 다가 먹었어도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아이들에게 마음껏 고기를 먹일 수가 있는 것이 감사해서 울었습니다. 입어야 할 옷들은 수와밋과 가라지 세일에서 그 당시에는 25센트만 주면 헌 바지 샤츠 헌 운동화를 살수가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두 아들(8살 12살)은 학교에 갔다가 오면 근처 공원으로 달려가서 버려진 깡통을 주웠습니다. 우리 부부는 어둑어둑해지면 아파트 단지 뒤에 있는 즐비한 쓰레기통에서 깡통을 주워서 팔아 2년 동안 다녔던 한국교회에 선교헌금을 보내며 기쁘고 감사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서 버려진 깡통을 보기만 하면 주워서 나무 밑에 숨겨 놓았다가 하교 길에 그 깡통을 주워 가지고 오기도 했고 어느 날은 마켙에서 사용하는 Cart를 집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아빠가 무거운 깡통을 어깨에 메고 다니는 것을 보고 Cart에 싣고 다니면 무겁지 않고 좋다고 어린 마음에 생각해 낸 것 이였습니다.

우리가족 모두는 부끄럽거나 수치스럽게도 생각지 않고 어렵게 살았어도 기뻤습니다.

길거리 나무 밑에 떨어진 오렌지가 아까워 주워 먹어도 감사해서 울기도 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하박국 3:17-18)

하나님께서 올 수 없는 길을 열어 주셨으니 미국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영주권도 마련해 주실 것이라고 믿으며 기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정을 통해 행하신 일들을 생각만 해도 감격스럽고 행복한 마음 이였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히브리서 11:1)

미국에 온지 두 달쯤 되었을 때 교회에서 야유 예배를 호숫가로 갔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점심을 맛있게 먹은 후에 아이들은 가지고 온 낚시로 물고기를 낚고 있었습니다.

 

우리 두 아들은 낚시 대가 없었기 때문에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가 들려서 가보니까 잘못 던진 낚시 바늘이 하필이면 큰 아들의 입가에 꽂힌 것입니다.

낚시 바늘을 뽑아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모두 모여서 기도하였을 때 큰 아들은 통증이 없는 듯이 가만히 있는 모습을 작은 아들이 보고 “하나님이 우리 형을 안 아프게 하고 계신거야 그치 아빠 !”

작은 아들의 믿음대로 아빠는 도구가 없어 차에 있는 뺀지로 낚시 바늘을 넣다가 뺐다가 연거푸 했음에도 마취를 한 것같이 아파하지 않았고 결국에는 낚시 바늘을 뽑아 내여서 모두 모두 할렐루야를 불렀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고 하신 뜻이라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 후 상처는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없어졌습니다. 두 아들은 착하게 미국 생활을 잘 적응하여서 고마웠습니다.

5개월 후에 L.A 북쪽 Northridge 에서 San Diego로 이사를 가야만 했습니다.

유학생 신분으로 학교에 등록을 해야 한다고 했기 때문에….. 사실 공부할 목적 보다는 미국에 살기위해 왔지만 그래도 학교 근처로 옮겨야 했고 또 영주권을 내어 주겠다는 어떤 분을 따라서 이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있는 돈마저 빼앗기고 영주권도 없는 상태에서 남편은 막 노동일을 해야 했습니다. 미국사람이 주인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먼저 일을 하고 있는 곳 이였습니다.

그 노동일이란 땅 파는 일 집수리 페인팅 푸러밍 인데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남편은 조수로 일을 하였습니다. 그 일을 하면서 누가 보던지 안 보던지 성실하게 꾸준하게 일을 했는데 주인이 유심히 본 것입니다.

8개월 만에 노동일에서 관리직으로 옮겨져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은 남편을 신임하여 비서 같이 모든 것을 관리하도록 맡기고 도와주었습니다.

“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히니”(창세기 39:4)

주인은 우리가 영주권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현찰을 주면서 우리 가족을 사랑하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나 시기와 질투가 있어서 영주권 없는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이민국에 고발하겠다고 전화기를 들고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주권 없는 서러움을 당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고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자꾸만 마음에 상처를 받고 스트레스가 쌓이다 보니 결국 대장 경련이 일어나서 어느 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대장 경련을 통하여 합병증이 생기면서 7년을 병으로 고생을 하였습니다.

남편은 벌어온 돈마다 병원 한의원 좋다는 곳마다 가서 나를 고쳐 보려고 했었고 금식기도 신유집회도 갔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누군가 금침을 맞으면 낫는다고 하여서 맞은 금침이 지금도 X-Ray를 찍으면 깨알 같은 금침이 제 몸 안에 천개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도 소용이 없었고 매일 같이 콩 먹듯이 약을 먹으며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살았습니다.

육신은 말할 수 없이 아팠고 고통 이였지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가정을 통해 역사하셨던 그 일을 생각하면서 밤 낯으로 눈물로 기도를 하며 부르짖었습니다.

 nbsp;